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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정리/무아와 유아의 현대적의미

제8장. 의식의 축소를 통한 무한과, 의식의 확대를 통한 무한

 제8장. 의식의 축소를 통한 무한과, 意識의 확장을 통한 無限 !


의식이 소멸하고 남겨지는 無限, 첫 번째 경우 그것은 의식이 없는 물질
일 뿐이다. 이것은 의식의
소멸을 통해서 무한이 성립된다고 여기는 것
은 有限과 무한, 의식과 존재를 영원한 대립으로 놓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무한은 결코 자각될 수 없다. 의식이 빠져야 무한이 성립하니까 그러하다.

자각할 의식이 남아 있는 한은 境界가 남아 있는 것이고
따라서 경계가 없는 무한에 도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한
자체가 意識性 내지 자각성을 갖지 않는 한 즉 물질인 한, 의식이 무한과 空을 의
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빈방의 확인은 불가능하다와 같다.
즉 빈방을 보기 위해서 방에 들어가면
더 이상 빈방이 아니니까 즉 의식
이 남아 있으면 무한을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 된다.


결국 무한을 물질로 생각하는 의식은 자기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무한
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하고 있
다는 점에서 자기부정과 자기모순의 의
식이라고 본다. 결국 유물론이 갖는 역설이다. 인간의식의 모
순을해결하기 위해서 서양인은 인간의 의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神의 의식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빈방인 것을 사람이 들어가 봐야 알지만 신은 빈방을 가지도 않고 빈방을 딱 이렇게 볼 수 있는 神의 의식을 떠올린다. 그래서 인간은 무한의 물질을 의식할 수 없지만 무한의 정신인 신은 그 물질을 의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무한을 물질
로 보는 경우에는 이런 물질로서의 무한하고 구분되는 神을 정신으로 놓기 때문에 결국 물질과 정신으로 이원화 시키고 개체적인 인간의 마음은 유한한 것, 신은 무한한 것, 그래서 결코 화합될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놓게 된다.


반면에 의식을 확장함으로서 무한에 도달한다는 것은 개체의 경계를 없
애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
는 것
이다. 개체적 자기의식을 넘어서 무한의
의식, 空의 마음, 참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 확산의 궁극
지점에서는 무
한의 空과 그 무한을 의식하는 마음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주객이 하나가 되어서 무분별지, 주객의 분별을 넘어서는 무분별지가 성
립하게 된다. 무한의 공이 그
자체가 바로 自己 自覺性을 가지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마음과 空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 무한의 마음,
空의 마음이 바로 한마음, 일심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의식의 확장이 개체적인 자기의식의 확장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개체적 자기의식은
경계를 통해서 성립하는 의식
이므로 언제나
주객 대립 속에 있기 때문에 경계 없는 무한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
기 때문이다. 주객 대립 속에서 밝혀지는 무한은 단지 의식에 의해서 대상으로 사유
되는 무한이지 그자체가 無境界의 무한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의식의 확장은 어떤 식으로 일어나야 되는가? 의식의 확장은
주객의 대립을 이루는 그러한
의식의 내용을 따라서가 아니라 의식을 철
저하게 비움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법이 無心法,
마음의 내용을 비우는 것, 그렇다고 마음 자체를 없애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의식의 내용을 비우고 마음의 산란함을 없애면 寂寂한 마음이 될 것이다. 적적한 빈 마음으로 나아가되 그 의식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서 성성함을 유지하는 것, 적적성성! 그 비어가는 마음은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 점점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적적성성의 수련법? 적적한 상태에서 자기의식의 확장이 집중 명상하여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 하여 엔돌핀을 형성하여 수행의 환희와 空으로 돌아가서 남는게 고통 뿐이라면 누가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겠는가? 그 비움이 무한에 이른다면 그 마음은 비어있는 공이되 깨어있는 마음, 무한의 마음, 한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무한과 공에 이르러서 한마음이 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불교는 언제나 일체의 존재를 품고 있는 무한과 공이 자기자각성이 없는 어두움 또는 물질이 아니라 자기자각성을 갖는 빛이고 밝음이고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수신결의 인용에 의하
면 “보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런 앎이 어둡지 않으므로 무정한 것과는 달리
성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한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비고 고요
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
이다.

이러한 청정한 공적의
마음이 곧 삼세제불에 수승하게 밝고 맑은 마음이며 중생이 본원에서 깨닫는 성이
다.
그것을 깨달아 지키면 앉아서 진여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해탈하며 그것을 미워하여 등지면 육도를
왕래하여 윤회할 것이다. 이렇
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