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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정리/무아와 유아의 현대적의미

제1장. 불교가 무아(無我)를 논하면서 윤회와 해탈을 설한 이유?

 

   제1장. 제1장. 불교가 무아(無我)를 논하면서 윤회와 해탈을 설한 이유?

   증득의 관점에서 보면 범부의 언설과 분별심은 궁극에 가서는 버려지는 것이나 증득지점에 이르기까지는 범부의
   언설과 분별이 필요하다.


   무아와 연기가 현대과학과의 일치는 과학의 기준에 따라 불교를 재단하는 느낌이 드나 한편 불교의 현대화라는 입장
   에서 보아 양면설이 대두되어지며 윤회와 해탈은 제외된다.


   먼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나는 몸의 경계에 따라서 타인과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설하면서 동시에 윤회와 해탈을 설한다. 그러나 내가
   없다면 누가 윤회하고 누가 해탈하는가? 이것은 내가 현상적으로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무
   아를 설 하신거냐? 아니면 내가 없다면 고통은 전혀 고통이 아니다를 위해서 무아를
설 하신건지?


   사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예 자기가 없다는 무아가 아니겠는가? 내가 없는 것이라면 나를 몰아서 백척간
   두에 세움은 또 무엇인가?


   내가 본래 없는 무아와 공이라면 공을 깨달은 자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자는 누구란 말인가? 즉 깨달음을 얻기 위
   해서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깨달을 자가 없어서 공의 깨달음이 불가능하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고 또
   나는 무엇을 깨닫고자 노력하는 것일까?


   불교는 “나는 나다”라는 자아의식이 허망하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흔히 나라고 하는 것이 오온(색수상행식) 중에서
   는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오온이 공이고 무아이다 라고 설하며 이는 인연화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라고 설하신다

                                     (無我와 有我의 현대적 의미 : 한자경교수) (Thought By/Way-Dam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