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무 한그루가 자기의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면 원래 이 나무는 옆의 나무씨앗이 떨어져 그 씨앗이 토지나
태양 등의 간접원인으로 인하여 현재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는 나무가 되었다. (즉 직접원인인 씨앗인 자기와 토지
및 태양 등의 간접원인인 타인으로 설명) 즉 나무는 자기와 타인을 계속 流動해 가고 있다. 즉 자기라는 경계가
계속 이동해 나간다.
이 유동을 관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유동 동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원과 원은 연속성은 있지
만 그렇다고 (처음의 원이 나중의 원과의 비교할 때 그 처음의 원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자기 동일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빵을 먹고 소화하면 그 빵이 나의 일부가 되듯이 현재의 이 몸은 과거 내 주위를 맴돌던 4대(지수화풍)가
나의 경계 상에 들어와 나로 바뀐 것이고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서 나의 경계 밖으로 나가면 반복되는 나의 욕망
을 따라서 또 4大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그래서 나의 몸이 유지된다.
그런데 이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책을 볼 때 읽는 나와 읽혀지는 책의 관념
으로 구분한다. 그리하여 나는 책의 관념과 거리를 취하면서 비판 검토한다. 나의 관념이 책의 관념을 읽어서
소화해 내면 그 책의 관념은 사유 주체의 내가 되고 만다.
즉 나는 이 관념에 따라서 인식하며 그 관념이 ‘나’이기 때문에 타인이 이 관념을 비판하면 나는 인격손상 및
자존심을 상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내 느낌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내가 소화한 부분도 있지만 일부는 타인의
생각. 인식이다.
이러한 것 들이 내안으로 들어오고 또 내가 그들에게 나가는 끊임없는 경계 유동에서 늘 자리 잡고 있는‘나’
라는 것도 계속 바뀐다. 그러므로 불교는 오온(五蘊)이 實我가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 인지되는 자아 즉 일시적
인 자아 즉 假我이다.
결국 自我는 실체 없는 경계 안에 말뚝을 박은 실체 없는 경계 안의‘나’에 지나지 않는다.
(無我와 有我의 현대적 의미 한자경 교수) (Thought By/Way-Dam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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